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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7. 7世 〉2. <부정공>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휘지산배풍산심씨묘표(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諱知山配豐山沈氏墓表)
1. 문헌 목록 〉7. 7世 〉4. <부정공>첨추공영당중건기(僉樞公影堂重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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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정공>첨추공영당중건기(한글)
첨추공영당중건기(한글) 영당 제실 중건기 7세조 자헌대부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휘 지산정부인 풍산심씨 풍산군 진의 따님 정부인 경주김씨 부윤공 훈의 따님 순창군부인 소주 첨추공 지산의 장녀 네 분을 한방에 모시는 집이다. 처음은 1492년 성종 23년에 서울에 모시었다 그 후 연산조의 사화로 국가가 혼란함에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로 옮겨와 제사를 행하다가 1781년 정조 5년 신축 이곳 순천시 덕월동 1160번지에 영당을 짓고 제사를 받들어 모시었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구전으로 전해 오는 역사를 이조실록과 문중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참고 하여 기록한다 첨추공께서는 세종 초기 문무 양과에 급제하시여 조정에 출사하시여 벼슬이 자헌대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이르셨다. 슬하에는 초취 정부인 풍산심씨 사이에 딸 한분 군부인이 되신 소주이시며 재취 정부인 김씨 사이에 장남 한손과 차남 귀손을 두시었다 장남 한손은 후손이 없어 동생 현감 귀손의 아들 균의 아들로 후사를 잇다 영당을 모시고 음력 12월 15일 행사하는 기록은 소주행록에 자세히 기록한다. 처음 영당은 첨추공 정부인 풍산심씨 군부인 소주 세분을 모시었다 연산군 이후 국가에 혼란한 시기가 오니 후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정부인 경주김씨의 묘소와 제일등을 실전하여 후손들이 할머니의 근거와 기록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 승주읍 백야산에 계시는 정부인의 시어머니신 숙부인 청산정씨 묘비에서 자세한 기록이 확인되고 부정공 파보 청산정씨 할머니 묘표 기록 파보 2권 517장 11행에 자세한 내력을 확인하고 2001년 12월 15일 영당에 함께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던 중 금번 제실과 영당을 신축 하고자 후손들이 여러 차례 의논하여 신망있는 회사와 질 좋은 자재로 시공하여 선조님을 새로운 제당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선산은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부정공 묘하에 첨추공 정부인 심씨 딸 소주 삼위가 계신다 정부인 경주김씨는 순천시 덕월동 산89번지 수안산 증통정대부 사헌부 지평 휘 몽룡 고손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휘 계훈 현손의 묘상에 초혼하시다(순창군 부인조씨 행록). 부인은 옥천 순창 조씨 8세손이며 부첨추공 지산 모 정부인 풍산심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 낳으셨다. 유년시에 천자문 사서삼경을 수학하고 요조숙녀의 본분에 이르니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고 한양의 공경대가에서 청혼이 자주 있더니 마침내 연분이 닿아 청주한씨 명문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자 청천군 한환에게 출가 하시었다 청천부원군의 따님이 예종의 비 안순왕후시니 부인과는 시누이 올케지간이 되었다 예종이 승하하고 인수대비의 작은아들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안순황후는 대비가 된다 이에 청천군 한환이 누님 안순대비의 권세를 업고 공경의 도를 잃고 오만 방자하여 여색에 빠져 첩 중생과 중놈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더니 첩과 중놈의 농간으로 부인을 학대하고 옷을 벗겨 구타하니 계집종이 말리자 종을 때려 죽였다 이에 안순대비께서 불러 훈계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장인을 구타하고 처가의 문이며 기물을 파손하니 부인께서 조정에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성종 21년 5월 27일 이에 성종임금께서 명하여 영돈령이상 의정부에서 논의케 하였다 성종 21년 6월 1일 이에 심회는 의논하기를 의금부에서 아뢴바대로 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윤필상 좌상 홍응 우상 노사신 윤호 성준 등이 의논하기를 한환이 이미 그 장인을 구타하고 처에게도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니 이미 남편과 아내의 도가 끊어졌고 사위의 도가 어긋났으니 모든 정황이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계본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격인데 괜찮겠는가 하니 영상 윤필상이 아뢰기를 ‘조정지격에 이르기를 사위가 장인을 욕보이면. 그 아내가 이혼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한환은 장인을 구타하고 처가댁을 파괴하였으니 부부의 도가 깨지고 함께 살기 어려우니 이혼시키자는 것입니다’하고 아뢰니 성종대왕이 하교하기를 한환은 외방에 부처하고 그 아내는 이혼시키라 명하다 성종 21년 11월 4일 어명으로 이혼하니 대비께서 부인을 불러 위로하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부인께서 답하기를 ‘제가 부덕하여 시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 죄 크거늘 무엇을 바라리까’ 하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시니 대비께서도 같이 울며 그대의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고 말하라 하니 ‘저가 이제 이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살아서나 죽어서라도 오직 부모님을 모시고 살까 합니다’하니 대비께서 거듭 위로의 말씀을 하시고 임금께 주청하여 순창군부인 소주 라 봉하고 도화서에 명하여 아버지 첨추공 정부인 풍산심씨 군부인 소주의 영을 그려 하사하고 사후라도 한방에 계시도록 하고 부인이 별세함에 나라에서 특명 부조하고 정부인 풍산심씨 기일인 음력 12월 15일에 후손이 영원히 봉사하다 슬프도다 군부인이시여 봉건 왕조시대에 삼종지도와 남존여비의 관습의 세상에서 오직 여자라서 핍박받는 절박한 세습을 타파 하시고 여자의 권리를 신장 시켜주신 대고모님께 존경을 머리 숙여 올리면서 행록을 마칩니다(어모장군훈련원첨정휘철석공행록). 공(철석)은 옥천조씨 11세손이시고 첨추공의 현손이시다 1563년 계해 명종 18년 출생하시었다 천품이 크고 건장하여 학문과 무예가 출중하여 주위의 선망이 크더니 만력무자 1588년 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을 행직하면서 엄격한 군율과 성심으로 부하와 융화를 이뤄 강군을 만드니 주위와 동료가 다 선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이 국경을 침범하여 국토가 적의 발아래 유린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공격하여 종사가 위태해지자 공이 도복할 뜻을 가지고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띄어말하기를 ‘지금 나라는 적의 침략으로 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파천하니 백성된 자 나라가 없으면 적의 발아래 목숨을 구걸할 것인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도 구국의 일념으로 싸워 이 나라 조선을 후손에게 물려줄 의무가 지금 우리에게 잊지 않는가’라고 크게 외치며 말를 달려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금산 전투에 선봉장으로 나아가 무수히 많은 적을 참살하시었다. 그러나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적의 공격을 받아 의병이 분패하자 부하장졸을 생각하면 같이 죽고자 하다가 군부의 원수를 앞에 두고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진을 뚫고 밖으로 나와 말을 채찍질하여 급히 달리니 분기가 더욱 일어났다 다시 남은 군사를 정돈하고 서로 꾀하여 말하기를 종사가 피난하였으니 신하 된 자 어찌 충의와 정성을 다하여 능히 나라의 위급함을 도모치 않겠는가 하고 다시 조중봉진중에 다다라 힘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중봉조헌장군께서 전사하시자 의리를 다하여 최후 한 사람까지 순절한 기록이 동의록 89장 광주전남 충의사록 의병장사적 764장에 기록되어 전하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혼을 불러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 산59번지 선영하에 모시였다(부사과선전관휘광서공행록). 공(광서)은 첨추공의 8세손이며 휘 철석의 고손이고 증호조참판 휘 기벽의 차남이시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남과 달라 천성이 중후하고 재기가 고결하여 지략이 뛰어나다. 또한 강개한 지절이 있어 일찍 무과에 등과 1713년 계사에 벼슬이 부사과와 선전관을 역임하시고 조정의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사임하고 향리로 내려오시어 스스로 본부의 천총이 되시어 군오를 정비하여 거느리니 위엄이 엄숙하고 자못장재가 있으니 여러 대중이 잘 따랐다 무신년 국난에 영장 유일기가 병을 핑계 삼아 출전을 거부하니 공이 대의로써 크게 꾸짖고 영장의 관복을 입고 본부의 군졸을 통솔하여 출전하니 조장군은 위국충정이 만인의 표상이 되더라고 하면서 본부 관민이 다나와 환송하였다 부대를 통솔하여 구례까지 진군하니 전령이 내려와 전하기를 난이 평정되었다고 전하니 부대를 회군한 사실이 동의록 21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공은 충의 명신의 후예로써 일찍 군마를 연마하여 무과에 등과하시고 군을 통솔하되 군율로써 다스리고 국란을 보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비록 큰 공을 못 세웠으나 나라에 충성한 붉은 마음은 만고에 빛날 것이니 어찌 대중이 공경하지 아니 하겠는가 라고 양무공신도감 219장 전남 광주 충의사록 1266장에 기록되어있다(열여경주김씨행록). 휘 광수 입순천 할아버지 건곡공 휘 유의 11세손이며 첨추공 8세손이며 가의 대부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휘 화벽의 삼남이시다 부인경주김씨는 명문가에서 엄격한 가훈을 지키면서 소학 효경 등 학문도 익히고 여자의 삼종지도를 잘 교육 받은 요조숙녀로 곱게 자라 주위의 칭송이 자자 하니 매파의 중매로 명문 옥천조씨 가문으로 출가하시었다 시집으로 오셔서 부모와 집안 어른을 공경으로 모시고 일가 간에 화목을 일우며 부군을 잘 모셔 금슬이 좋기로 소문나니 주위가 부러워하였다 1689년 전염병이 창궐하여 마을마다 금줄을 치고 집집마다 액막이를 하면서 병이 올 까 두려워하였으나 마침내 월곡 마을에도 전염병이 옮겨와 남편께서 병에 걸리니 부인이 낮이나 밤이나 천지 신명께 치성을 드리고 힘써 간호하면서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성으로 간호한 보람도 없이 세상을 하직하매 부인이 애절한 통곡을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어찌 혼자살리오 하면서 시체를 끌어않고 통곡애통 하드니 7일 만에 같이 따라 죽었다. 주위 인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두 시체를 함께 묻어 주면서 말하였다 ‘이러한 부부를 두고 천상배필이라 말하겠네 진심으로 한방에서 살고 한 무덤에서 죽었다고 이를 만하네’ 살아서는 지 아비 주검을 대신 할 수 없으니 이 몸이 산들 누구를 기다리까 지아비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고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네요 제가 지금 죽지 않고 주검 곁에 있지만 저는 참으로 주검을 안고 죽으리라 명세합니다. 죽음을 안고 함께 황천으로 돌아가면 그 누구도 우리를 이별시키지 못하겠지요 이 뼈는 천년 후라도 연리지와 합환선이 되어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지금 이 열부만이 정려비 세워지지 못한 것을 나는 이 일을 탄식하여 마지않는다 삼효재가 기록한 강남악부 65장 순천대학교 남도문학연구번역본이 112장에 기록이 되었다(계음공 휘 두현 행록). 공은 첨추공의 12대손이며 자는 대윤이며 고조는 휘 광수 증조 휘 익후며 조 휘 도천이시고 부는 휘 이정이시다 공은 정종경신 1800년 8월 20일에 월곡에서 출생하시었다 하늘에서 받은 자질이 영민하시고 얼굴과 거동이 단정하여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소학 효경 등 사서삼경을 섭렵하고 예문에 밝아 주위의 선망을 받으시다 부모를 섬기메 효행을 다하고 자리 깔고 문안하며 따뜻하고 서늘함을 묻는 절차와 나아가고 들어옴에 반듯이하고 허락받고 행하였으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비록 가난하였으나 나무하고 고기잡아 좋은 반찬을 만들어 드리고 대소사에 반드시 묻고 하문이 계시면 행하며 혹 몸이 불편하시면 주야 없이 약을 다려드리고 대소변을 점검하면서 정성을 다하고 병이 낳은 후에 그만 두었다 부모님 상을 다하여서는 삼대상 모두 예법에 따라 행하고 상복을 벗지 않고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슬퍼하니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효로써 효를 상한다고 위로하니 자식 된 자 어찌 예를 어기며 망녕되게 행동하겠는가하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일생을 삼형제가 한방에서 거처하며 화락하고 또 즐겁게 지내니 첨추공 사형제의 상호전 규칙을 잘 행하였다 일생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예복을 갖추면 저녁까지도 좌정하시고 흐트러짐이 없으시니 세인이 양반님이라 칭하며 우러러 존경을 표하다 그리하여 순천향교 도유사와 본부의 아관을 지내시고 신미년 4월 17일 세수 72세로 고종하시니 군민이 다 슬퍼하고 출상길에 만장이 십리에 이르다 아 공께서는 충효 명문의 귀감이 되니 순천시 효자편에 사림의 추천으로 기록되니 후손들의 자랑이요 이를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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